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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_Climb a mountain

팔달산과 정조의 화성 팔달문(3부)

by 의성별 2025. 2. 11.

팔달산

팔달산과 화성

 팔달산 서장대는 수원시의 중심에 위치한 높이 143m의 산입니다. 예전부터 이산은 다른 어느 산과도 연결이 되지 않고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평평한 땅에 탑을 세워 놓은 것과 같다고 해서 탑산이라 불렀다 합니다. 고려 공민왕 때 집현전 직제학까지 지낸 이고 선생이 은퇴하여 팔달산 근처에서 살고 있을 때 공양왕이 사자를 보내어 이고에게 '요즈음 에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라고 물으니, 이고 선생께서는 '집 뒤에 있는 탑산 경치가 아주 아름답고 산 꼭대기에 오르면 사통팔달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즐겁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이고 선생을 존경하여 여러 번 벼슬을 권했지만 이고 선생은 끝내 벼슬 길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화공을 시켜 이고가 살고 있는 탑산을 그려오라고 했고, 그려온 그림을 보고는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 크게 감탄하고, 산 이름을 팔달산이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위치: 수원시 중심 위치

해발: 143m

산행거리: 5.74km (화성 한 바퀴)

산행시간: 3시간(휴식시간 포함)

네비검색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105 수원 화성 연무대 주차장   

산행코스: 연무대 주차장 → 방화수류정과 용연   화홍문 → 장안문 → 화서문 → 팔달산 정상(서장대)

 → 팔달문 → 팔달 시장 → 남수문 →  동남각루 → 봉돈 → 창룡문 → 동북공심돈 → 연무대

 

《산행시작》

효원의 종

 팔달산 정상에는 효원의 종이 있습니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며, 종의 전면에는 시의 상징물인, 은행나무, 철쭉, 비둘기 등과, 화홍문을 위시한 수원화성의 주요 문화재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효원의 종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구경 2.15m, 높이 3.54m, 무게는 3,300관(약 12.5톤)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에서는 시민들 누구나 타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효원의 종 옆에는 매표소가 있는데 요금표는 1~2명은 1,000원, 3~4명 2,000원이며 타종은 모두 세 번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타종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두 번째 타종은 가족의 행복을 빌면서, 세 번째 타종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타종합니다. 

서포루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누각 시설입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누각 옆에는 오방기의 흰색 순시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고 있어 기분 좋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서장대 관광안내소

 팔달산 서장대로 오르는 들머리입니다.  성곽 밖으로 보이는 서장대 관광 안내소와 진달래 화장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폭설로 찟겨진 소나무

 전번의 대폭설로 팔달산 주변의 낙락장송의 귀한 나무들이 찢겨져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폭설의 위력은 대단하였습니다. 다행히 낙랑장송의 가지들이 꺾였기 때문에 잘라내고 전지 하면 더욱 멋있어질 듯합니다. 다음에 와서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는지 둘러보아야겠습니다.

서남암문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입니다. 화성의 5개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시를 세웠습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습니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입니다. 화양루로 가는 길은 빙판길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남포루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로, 북서포루 5곳의 포로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습니다. 그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은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입니다. 눈 덮인 남포루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홍난파 노래비

 수원시의 중심부 팔달산 기슭에는 한국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너비 1.5m, 높이 3m의 화강암으로 된 노래비(碑)의 상부에는 난파의 동판 초상화가, 아래엔 '고향의 봄' 노래판과 악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노래비는 수원이 고향인 난파(蘭坡)의 공적을 추모키 위해 1968년 10월 15일, 탄생 70주년을 맞아 수원 시민의 날 행사인 화홍문화제 때 세운 것입니다. 고향의 봄,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곡이 수없이 많은데 친일파라는 낙인으로 시민들이 쳐다보지 않는 홍난파 노래비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민족의 비극입니다.

팔달문으로 내려 가는 계단길

 팔달문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길입니다. 한편에서는 고등학교 축구부의 학생들이 코치 선생님의 지시를 받아 팔달문까지 뛰어오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붉은 색 오방기

 붉은색 오방기가 바람에 휘날립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이 빙판길을 피해 양지바른 길로 조심조심 산행을 하고 계십니다. "어르신! 많이 걸으셔서 건강하십시오."라고 인사를 하자 활짝 웃으시며 좋아하십니다. 

팔달문 안내소

 팔달문 안내소입니다. 성곽길 눈치기 작업과 눈으로 꺾인 소나무 전지 작업을 해서인지 관리인 아저씨들의 옷을 양지바른 곳에 걸어 놓고 말리는 모습도 멋있는 진풍경입니다.

미복원 화성

 미복원 화성 성곽길입니다. 원래는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남서/동 적대가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팔달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건너편 팔달문시장 쪽에는 건축물 등이 워낙 많아 이걸 다 허물지 않고는 복원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수원시에서는 시장 주민들과 협의 중에 있다고 하나, 반대하는 주민이 많아 순탄치 않다고 합니다. 협의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2029년까지 성벽이 복원될 예정이라 하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꼭 성공되기를 기원해야겠습니다.

팔달문

 팔달문은 경기도 팔달구 정조로 780에 위치해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으로 수원 화성의 남문입니다. 팔달문은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 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 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방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습니다. 이 옹성은 정조 당시의 것을 1975년 복원 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402호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화성이 복원되기 전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동문(창용문)은 도망가고, 서문(화서문)은 서있고, 남문(팔달문)은 남아 있고, 북문(장안문)은 부서지고"라고 하며 화성 4대 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향이 수원부근이라 초등학교 시절 이곳 화성에 와서 보물 찾기도 하고, 술래잡기와 달리기를 하던 옛 생각이 나는 추억의 장소였습니다.

팔달문 시장

 팔달문 시장은 수원화성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라도 해남에서 터를 잡고 무역업을 하고 있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을 수원으로 불러들였고, 전국의 상인들이 수원을 주시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팔달문 전통시장은 매향교에서부터 시작하는 통닭거리와 그 밑에 가구거리, 그리고 상가 안에 자리하고 있는 패션거리로 구분되며 여러 길거리음식들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예전에는 이곳에 남문 DJ 음악다방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커피도 마시고 듣고 싶은 음악을 적어 DJ에게 갖다 주면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 주어 황홀하게 음악을 듣곤 하였습니다. 저는 매번 ABBA의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을 신청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방 앞을 나오는데 자리를 펴고 점을 치던 점쟁이 아저씨가 저를 불러 복비도 받지 않고 뚫어지게 보더니 공직자가 되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다고 칭찬을 하여  기독교인인 저는 "별 미친 점쟁이 다 보았네" 하면서 지나갔던 곳도 이 팔달문 시장에서였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공직자로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랐으며 독백으로 "나의 모습이 그렇게 괜찮았나"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동시장

 지동시장은 주로 농축산물, 수산물, 건어물, 청과물 등의 식재료를 취급하며, 식당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지동시장 내에 있는 '순대 타운에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수원시 우만동에 살 때 가족과 함께 성빈센트 병원 앞으로 걸어와서 통닭과 과일, 수산물 등을 구입하였습니다. 가격도 싸고, 물건도 많고, 참으로 좋은 시장이었으며 특히 아들과 딸에게 순대, 찐빵, 만두, 도나츠, 족발 등을 사주어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였던 시장이었습니다.

화성 남수문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입니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가 있는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홍예가 있습니다. 홍예란 무지개같이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높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고,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습니다. 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2012년에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습니다. 예전에는 이곳 남수문 밖에다가 수원 감옥이나 광장에서 망나니(회자수)에게 참수받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이곳에 버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망나니의 칼춤을 생각하니 어깨가 오싹해집니다.

남수문에서 화성으로 올라가는 통로

 남수문에서 화성 동남각루로 올라가는 통로길입니다. 수원천 변으로 조막 조막 한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광교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눈 녹은 물이 맑게 졸졸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리 난간에는 고드름이 얼었다가 햇볕을 받아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남수문에서 올라가는 돌계단길

 남수문에서 화성 동남각루로 올라가는 돌계단길입니다. 약간은 가파를 계단길이지만 성곽 총안구로 보이는 성밖마을이 고향집 같이 포근하고 정겹습니다.

동남각루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입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一) 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부릅니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면에는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습니다. 추운 겨울에 군불을 때고 고구마나 군밤을 구워 먹으면서 보초를 서면 겨울의 하루가 빨리 지나가고 정감이 넘쳤을 것입니다. 

오방기와 아름다운 성곽길

 오방기 영의 파란색 깃발이 휘날리니 마냥 정겹게 느껴집니다. 추운 날씨지만 간간히 화성을 탐방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뒤편으로는 광교산의 모습과 신광교의 아파트 숲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입니다. 

동2포루

 동2포루는 봉돈 남쪽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입니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습니다. 동2포루는 동1포루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개방된 구조입니다. 측면 3칸인 동1포루에 비해 치성이 짧아서 측면 2칸의 건물로 만들어졌습니다. 포를 쏘는 포로가 마치 궁전의 정자 같이 아름답습니다. 

게이트볼장

 게이트볼장입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추운 날씨에도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려고 게이트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기원하면서 걸어 지나갔습니다.

봉돈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입니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입니다. 높게 쌓은 대 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 다섯 개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서 곳 모두 연기를 피웠습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수원 동문교회의 교회탑이 외국의 궁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2치

 동 2치는 동포루와 봉돈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며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2치는 1979년에 화성을 복원하면서 다시 쌓았습니다. 본래 성돌이 붉은색을 띤 반면에 새로 쌓은 곳은 가지런히 다듬은 흰색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치성 좌우에 있는 옛 성돌에서 돌을 뜨기 위해 정을 박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벽돌 색깔이 확연하게 표시가 납니다.

동포루

 동포루는 동 1치와 동 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로, 북서포루 5곳의 포로가 있는데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서는 규모를 줄였다고 합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과 주변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들었습니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습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1층과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태극문양의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굴다리

 굴다리입니다. "화성성역의 궤"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굴다리입니다. 성밖으로 내려가보았더니 산책인들의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으며 지동 시장 쪽에서 오는 택배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저의 앞길로 위험하게 달려 지나갔습니다. 

동1치

 동 1치는 동1포루와 동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입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치는 꿩을 말하는데 꿩이 몸을 잘 숨기고 엿보기 잘하는 특성이 있어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 1치는 평탄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규모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멀리 우만동 아파트 단지가 보입니다.

동1포루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입니다. 동 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릴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했습니다. 벽이 없으니 시계는 좋습니다.

창룡문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입니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고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합니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합니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입니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 창룡문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6.25 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감나무

 화성 행궁동 쪽에서 와서 서낭당 고개를 넘으면 창룡문 옆에 지하도 비슷한 도로가 나있습니다. 이 길은 안양 쪽으로 이어지는 경수 산업도로와 만납니다. 이곳에는 예전부터 감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가을철 차량을 타고 지나치면 너무 먹음직도 하고 아름다워 차량을 세우고 창룡문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곤 하였습니다.

동북노대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입니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잘 활보되었습니다. 동북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 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벌이 주변의 감나무를 좋아해서인지 벽돌을 벌의 허리처럼 아름답게 축성하여 더욱 아름답습니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습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습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입니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조 21년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예전 화성 성곽 달력을 만들 때 대표적으로 들어갔던 장소가 이곳 동북 공심돈이었습니다.  소라모양의 계단과 연무대 앞의 넓은 잔디밭과 연무대의 웅장한 모습이 제일 멋진 장소 1위였던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정식 명칭은 화성(華城)이며 별칭으로는 수원성(水原城)으로 불립니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또한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화성 한 바퀴 5.74km를 돌았습니다. 특히 감명 깊었던 곳은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전설,  팔달산 서장대 정조대왕의 시문, 팔달문과 남수문 밖 시장 사람들의 모습,  창룡문과 감나무의 풍성함, 연무대의 훈련장소와 넓은 잔디밭의 활터, 동북공심돈 건축물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4대 문과 수문, 적대, 공심돈, 봉돈, 포대, 장대등 다양한 구조물에 놀랐으며 축성에 동원되었던 1,280명의 공장의 숨소리와 376,342일의 연동원 인원들의 환호성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보람 있고 많은 것을 배우는 귀중한 하루였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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