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건지산
서천 건지산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에 위치한 해발 170m의 산입니다. 산의 정상부에서 서쪽면으로는 건지산성이, 동쪽면으로는 한산읍성이 위치해 있습니다. 건지산성은 백제 부흥군의 최대거점인 주류성으로 알려져 있고, 한산읍성은 조선시대에 세워졌으며 금강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는 중요한 요새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천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에서는 삼국시대에 한산모시의 원료인 모시풀이 처음 발견되어 한산모시의 고장이 된 곳입니다. 또, 백제가 멸망하자 건지산에서 백제의 유민들이 한을 달래기 위해 소복을 입고 술을 빚었다 해서 소곡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건지산 동쪽으로 한산읍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한산 읍내 전경을 볼 수 있고 한산 읍내에는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의 묘와 지현리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또한, 건지산 서쪽으로는 한산 향교가 있으며 좀 떨어진 곳에 숭정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멀리 금강이 보이며, 북쪽으로는 기린봉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문헌서원과 목은 이색선생의 묘가 있다.
위치: 충남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에 위치
높이: 해발 170m
산행거리: 왕복2.40km
산행시간: 50분(휴식시간 포함)
네비 검색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한산로 113 한산면 행정복지센터 앞 공영주차장
《산행시작》
한산면 행정복지센터 앞 공영주차장입니다. 주차장은 넓고 주차비 없습니다.
한산행정복지센터에서는 주민의 편의를 위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국가기관입니다. 한산면민에게는 친절하고 듬직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입니다. 용무가 있으신 분들은 이곳에 들렸다 가시면 됩니다.
건지산 등산로 들머리입니다. 정상까지 0.75km입니다.
건지산 안내도입니다. 우측은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의 묘가있으며, 좌측은 운동기구가 있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길이 저희 부부를 정겹게 맞이해 줍니다.
한양읍성 안내판입니다.한산읍성은 조선 문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읍성은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한산읍성은 1914년 이전까지 한산군의 행정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둘레는 1,082m이며 높이는 1.5 - 2m로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곳이 가장 높습니다. 성벽에서 약 8m 떨어진 지점에는 폭 2m 정도의 해자가 있습니다. 《신국동국여지 승람》에 기록된 한산읍성은 돌로 쌓은 성이며 성의 둘레가 4,070척(1,233m), 높이가 11척(3m)이고, 성안에 도랑 1개와 우물 4곳과 읍성 안에는 객사, 내아, 매화당의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산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보면서 정취 깊은 돌계단 길을 올라갑니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조선시대 성터인 한산읍성 표지석이 한성읍성 중간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산읍성은 충남문화재 자료 제134호로 1984년 05월 17일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한산읍성은 많이 복원되고 있으나 서벽 중간지대를 중심으로 서벽은 농로로, 동벽은 민가의 담장으로, 남벽은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도로가 나 있어 성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나 8m 정도 떨어진 곳에 해자(垓字)로 보이는 넓이 2m, 깊이 2~3m, 길이 100m 가량의 고랑이 패어 있습니다. 건지산으로 산행하기 전 북벽에 올라 동벽쪽으로 내려갔더니 쇠창살문 담장이 쳐져 있어 통행이 불가하였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나이 드신 여자분에게 이곳으로 갈 수 없냐고 묻자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셔서 감사하게 집안으로 들어가 동벽쪽 한양읍성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곳입이다. 이곳이 한산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한산성터에서 바라본 조망입니다. 한산읍과 한산뜰.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생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12월 중순의 날씨인데도 조락한 단풍잎이 나뭇가지에 많이 달려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나무에 매달려 있는 단풍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를 생각하면서 저 낙엽은 언제 떨어질까 궁금해졌습니다.
올여름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산사태지역 범위가 꽤 넓으며 시급히 사방공사가 필요한 지역입니다.
조망이 보이는 곳에서 한산 읍내를 바라봅니다.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이 있는 어성산과 동자북이 보이고 신성리 갈대밭과 금강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적송 숲길입니다. 빽빽하게 도열해 있는 적송 숲길을 걸으니 막혔던 심장이 활 뚫리는 듯한 신성한 충격파를 받아 신선해집니다. 한산읍에서는 야간 산행인을 위해서 곳곳에 원형 조명등을 세워놓아 길잡이 역할을 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정상 정자입니다. 전쟁시에는 장군이 지휘하였던 지휘소 같습니다. 이곳에서 금강이 한눈에 조망되니 왜구등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가 무척 좋았겠습니다.
건지산 정상석입니다. 조그마한 정상석을 붙잡고 기도한 후 서천, 한산, 부여, 금강을 바라본 후 서기 660년 백제 패망 날을 생각해 봅니다. 의자왕은 금강을 통하여 중국으로 잡혀가고, 백제 부흥운동도 무산되어 부국강병하였던 백제 유민들의 한을 이 건지산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하산은 건지산성과 봉서사를 둘러보고 목은 이색의 문헌서원을 탐방해야겠습니다.
건지산 정상에서 부여 방향을 향하여 묵상해 봅니다. 망국의 한이 얼마나 컸으면 소곡주를 만들어 마시며 시름을 달랬을까 생각해 봅니다. 곡창지대인 넓은 한산뜰이 보이고, 제일 좌측으로 고촌지,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생가, 축동저수지, 원산 너머로 부여땅이, 그 너머에는 백제의 수도 부여가 멀리 보입니다. 저의 생각은 이곳을 건지산이라 할 것이 아니라 망산이라 부르면 어떨까 생각도 해봅니다.
하산길입니다. 건지산 정상석 옆에 건지산성 표지판이 있습니다. 건지산성은 건지산 정상부를 둘러싼 말안장 모양의 흙으로 쌓은 내곽과, 서북쪽의 계곡을 두른 돌과 흙으로 쌓은 외곽의 이중구조로 된 산성입니다. 내곽은 둘레가 약 350m 정도이나 외곽은 약 1,300m 정도로 된 큰 규모의 산성으로서 백제 말기에 당과 신라군에 대항하던 백제부흥 운동의 주요한 거점이었던 주류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안에는 봉서사란 작은 절이 있고, 성안에는 백제 토기 조각등이 출토된 건물터가 남아있습니다.
해발 170m의 높이에 위치한 건지산성을 따라 멸망한 백제의 역사를 생각하며 걸어내려 갑니다. 아! 백제여! 660년 7월 18일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의자왕이 항복하고 웅진과 사비가 함락, 백제가 멸망하자 옛 백제 땅 각지에서 백제 부흥을 위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복신, 도침이 주류성에서 일어나 중심을 형성하였고, 백제 다른 왕족들은 이미 당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에 부흥군들은 왜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후 이곳 주류성은 부흥백제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서기 663년 8월 17일 신라군이 주류성을 포위했고 부여풍과 왜장들은 백촌강에서 집결해 싸웠지만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여 같은 해 9월 7일 결국 주류성이 함락되었고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해발 고도가 낮은 서문지로부터 토성길이 이어집니다. 완만하게 고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약 450m를 오르면 왼쪽은 산봉우리, 오른쪽은 계곡으로 나눠집니다.
토성에 물이 잘 배수 되게 수로가 깊게 파여있고 토성의 넓이도 상당히 넓습니다. 오르는 동안 오른쪽에 높이 4~5m 긴 토축이 뱀처럼 길게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하단부가 넓고 상단이 비좁은 사다리꼴입니다. 성벽 위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많습니다. 산성은 군데군데 절단된 부위가 눈에 뛰며 그 부위에 황토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 안내판에는 건지산성 문화재 학술조사현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지산성은 포곡식 산성과 퇴뫼식 산성 2개로 이루어진 혼합식 산성으로 1998년 정밀 지표조사 결과 포곡식 산성에서 동문과 서문으로 추정되는 지점과 건물지 5개소가 확인되었습니다. 성내에는 7개소의 우물과 연못 1개소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우물 4개소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탄화미가 확인되는 조선시대 군창지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곳 서문 터는 성벽이 끝나는 지점을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보면 밖으로 기울어지고 반대쪽은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서문터는 목은 이색 선생을 배향하는 문헌서원과 이어집니다. 도로 출발점 고개부근이 외성 서문 터로 추정됩니다. 도로 중간지점 오른쪽에 봉서사가 있고 사찰 못 미쳐 오른쪽이 성안 둘레길 진입로이며 건물 터 5곳과 군창 터가 이 부근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찰은 행정치소로 보입니다. 토축은 긴 오르막의 연속이고, 올라갈수록 지형이 가파르고 험난해집니다.
봉서사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건지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정 제6 교구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봉서사는 극락전과 심검당, 산성각, 종무소가 있으며 보물 제1751호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있습니다. 봉서사는 작은 절이지만 소박하고 산새소리 등의 자연소리가 나는 묵직한 사찰입니다. 또, 건지산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성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던 사찰입니다. 봉서사는 월남 이상재, 석북 신광수, 석초 신응식 등 서천 출신의 인물들이 꿈을 키우던 곳으로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찰입니다.
문헌서원 주차장입니다. 네비 검색지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82 - 1 문헌서원 주차장입니다.
홍살문 앞의 하마비입니다.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비석의 표면에 적혀 있습니다. 각 궁궐의 정문밖, 종묘 입구에 세웠으며,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 홍살문에 하마비를 세웠습니다. 왕이나 장군, 고관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 놓기도 하였는데 ,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예의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은 기둥의 색을 붉은색으로 칠하였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모양의 나무살 때문입니다. 또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화살 또는 삼지창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서천 문헌서원은 고려말 대학자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입니다. 목은 이색의 시호는 문정공으로 고려 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지낸 관리이자 학자입니다. 고려 말 삼은(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한 분으로 3년상을 제도화하고, 성리학 발전에 공헌하셨습니다. 진수문은 외삼문을 말합니다. 외삼문은 중심건물의 출입문으로 우측문으로 들어가서 좌측문으로 나오면 됩니다.
문헌서원 진수당입니다. 진수문을 지나니 강학공간이 나타납니다. 진수당은 문헌서원의 원생들이 학업에 정진하며 수양하던 강당입니다. 강당의 현판인 진수당은 주역에 나오는 진수덕업에서 가져온 말로 "덕을 쌓고 학업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장판각은 선현들의 문집이나 판각본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장판각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인 '가정목은 선생문판'등이 보관돼 있습니다.
동재는 서원 강당의 동쪽 건물로 원생들이 수학하며 생활하던 기숙사입니다. 맹자와 중용에서 나오는 존양성찰에서 유래한 말로 '마음의 본성을 지키며 자기 잘못을 살피고 반성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원 좌측 언덕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기린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묏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묘 2기 중 하단에 있는 묘는 셋째 아들 이종선의 묘입니다.
문헌서원의 아름답게 조성된 연못과 경현루입니다. 서천은 아내의 고향입니다. 처갓집 식구들은 서천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좋아합니다. 어릴적 나무하던 이야기, 소풍 갔던 이야기, 감 따먹었던 이야기, 장모님이 모시 짜던 이야기, 장인어른이 흥이 많아 장구 치며 노래하였던 이야기 등이 끊이지 않으며 좋아들 합니다. 오늘 이렇게 서천에 내려와서 역사탐방으로 건지산과 건지산성, 한산읍성을 둘러보고 목은 이색선생의 문헌서원을 둘러보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는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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